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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세관의 노동일지 — 2 본문

A Seoul of Singularities

감정 세관의 노동일지 — 2

DATAUNION 2025. 8. 2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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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동대문 새벽 알고리즘이 예고했던 감정이 실제로 올라왔다. 오늘의 권장 감정: 유예.
기다림을 예의로 연마하라는 뜻. 출근 전에 물 한 잔을 마시다, 손목 디스플레이에 호출이 떴다. 서울역의 개인 시계가 집단 지연에 들어갔다. 플랫폼 5, 7, 11—승객 다수가 “아직 아니다”에 묶였다. 열차는 와 있고, 표는 발권되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른 시간이 발목을 잡는 중.

나는 마포대교를 건너지 않고 노선을 틀었다. 오늘은 세관보다 역이 먼저였다.

서울역 중앙홀은 둥근 천장에 시계가 무수히 매달려 있다. 예전처럼 하나의 표준시를 가리키지 않는다. 각 시계는 사람 한 명의 리듬에 연결되어 초침이 제각각 흔들린다.
지금, 초침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주저하는 모양새였다. 음표로 치면 쉼표 과다. 플랫폼 7 앞에서 유모차를 밀던 젊은 엄마가 나를 붙들었다.

“제 시계가 ‘아직 아니다’라는데, 열차는 지금이래요.”
“애기 시계는요?”
그녀가 아기의 손목에 찬 얇은 밴드를 보여준다.  이라고 뜬다. 어른과 아이의 시간차. 이 도시에선 흔한 일이지만, 오늘은 군중 규모로 겹치고 있었다.

역무본부에서 시차 봉헌자가 나와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무속 OS 운용팀 배지를 달고 있다.
“오늘 업데이트가 ‘망각→연대’로 바뀐 뒤, 유예값이 과감해졌습니다. 다들 서로를 기다리려는 경향이 커졌어요. 좋은 일인데… 열차가 움직이질 않네요.”
좋은 일과 막힌 일의 간극. 내 일거리다.

나는 방송 채널을 하나 열고, 역의 공지 화면에 짧은 문장을 띄웠다.
“지금부터 7분 간, 공시(共時)를 엽니다.”
누군가가 묻는다. “공시가 뭐죠?”
“각자의 시간을 억지로 맞추는 게 아니라, 겹치는 순간만 잠깐 크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절차는 간단하지만, 말과 숨을 정확히 맞춰야 한다.

  1. 번역 식물 차
    중앙홀 화분에서 잎 몇 장을 얻어 뜨거운 물을 부었다. 역의 공기, 사람들의 속말, 금속 차륜 소리가 잎맥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는 방송 마이크를 눌러 잎이 번역한 문장을 읽었다.
    “당신은 기다릴 수 있다. 당신은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 당신은 이제 함께 기다릴 수 있다.”
    문장은 주문이 아니었다. 다만 사실을 소리 내어 확인하는 일. 몇몇 시계의 초침이 맥을 같이 치기 시작했다.
  2. 편의점 면역계 스티커
    역내 편의점에서 지연 과민 진정 스티커를 꺼내 플랫폼 라인마다 붙였다. ‘도착 안내 음성에 심장이 빨라지면 이쪽으로 발을 옮기세요.’ 스티커는 바닥이 아니라 사람의 시선이 오래 머무는 에 붙여야 효과가 좋다. 기둥과 기둥 사이, 계단과 벽의 모서리.
    스티커 근처에 선 사람들의 개인 시계에 얇은 파형이 잡혔다. 기다림의 곡선들이 서로를 닮아갔다.
  3. 제사의 스트리밍—감시자 호출
    검은 제복의 보안요원이 다가와, 이걸 왜 여기서 하냐고 묻는다. 나는 그에게 스트리밍 링크를 건넸다. “지금은 고별이 아니라 동기화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이 기다림이 공정했음을 봐줘야 해요.”
    해외 체류 중인 가족들, 야간 근무 중인 간호사들, 대기 중인 택배 기사들이 채널에 들어왔다.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화면 아래에 줄지어 나타났다. 기다림은 누가 보고 있을 때 견디기 쉽다.
  4. 공시의 종
    서울역 천장 중앙에 오래된 종이 하나 달려 있다. 그동안은 장식이었다. 나는 무속 OS의 보조 메뉴에서 ‘공시 모드—7분’에 체크하고 봉헌자와 함께 줄을 잡아당겼다.
    첫 타가 울릴 때, 플랫폼 7의 전광판과 아이의 손목 밴드가 동시에 _지금_을 띄웠다. 엄마의 시계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유모차를 밀어 문턱을 넘었다. 열차 문에 빨려 들어가듯 들어가고, 그 뒤로 사람들이 순서 없이, 그러나 부딪치지 않고 흘렀다. 겹치는 순간이 커진다는 말이 이런 모양일까.
  5. 후속 기록—서울역의 개인 시계 로그
    나는 역무실의 터미널에 오늘의 공시를 기록했다. ‘강제 동기화 없음. 의례 기반. 증언 3,214명.’
    봉헌자가 내 이름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직군 코드가 바뀌었네요. **통행 서사자(臨時)**에서 ‘서사 공무—교통’로.”
    나는 웃었다. 호칭은 늘 뒤따라온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건넜다는 사실뿐.

사람 물결이 가라앉자, 나에게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 경복궁의 민서였다.
아까 그 어르신, 다리를 건넌 후 ‘퇴장 광고인’으로 등록했대. 오늘 저녁, 첫 작업이 있대.
퇴장 광고인? 민서는 사진 하나를 보냈다. 꺼진 전광판 대신, 한강 변 난간에 붙은 종이 전단. ‘오늘 보내는 법 강의—도시판.’ 화살표 아래로 작은 QR이 있었다. 스캔하니 제사의 스트리밍으로 연결되었다. 댓글 첫 줄: 당신이 붙인 불빛, 우리가 봅니다.

나는 다시 역을 한 바퀴 돌았다. 플랫폼 11에서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한 청년의 개인 시계가 어제에 멈춰 있었다. 아침에 싸운 메시지 스레드가 끝나지 않은 채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열차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의 끝을 오늘 써야 하네.”
나는 그를 데리고 서울역의 개인 시계 수선소로 갔다. 오래된 시계공이 자리를 지킨다. 기계 수리가 아니라 사유 정밀작업을 하는 곳. 시계공은 청년의 손목 밴드를 조심스럽게 벗기고, 유리덮개 안에 넣었다.
“어제의 글자를 오늘로 옮기려면, 문장 하나를 빼야 합니다.”
“어떤 문장이요?” 청년이 묻는다.
“반복되는 변명.”
청년은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시계공은 기다리는 데에 숙련되어 있었다. 유예는 여기서 반짝이는 도구였다. 눌러 붙은 말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열이 필요했다.
잠시 후, 청년이 아주 짧게 말했다. “미안하다고만 하지 않을게.”
시계공이 미세한 드라이버로 밴드 안쪽 접점을 눌렀다. 청년의 시계가 오늘로 넘어왔다. 열차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뛰지 않고 걸었다.

점심 무렵, 역에 햇빛이 스며들었다. 둥근 천장 아래, 수천 개의 개인 시계가 여전히 제각각이었지만, 겹치는 부분이 넓어져 있었다. 그 넓은 부분을 사람들은 통로라고 불렀다.
나는 방송 채널을 닫으며 짧게 덧붙였다. “유예는 미루기가 아닙니다. 서로를 기다리는 기술입니다.”

퇴근길에야 마포대교를 건넜다. 감정 세관에서는 오후 기록 정리가 한창이었다. 오늘의 보류 사유 상위 항목이 바뀌어 있었다. ‘불확실성 회피’↓, ‘타인 배려로 인한 지연’↑
동료가 내게 눈짓했다. “네가 역에서 판 일의 여파겠지.”
나는 기록창에 작은 문장을 남겼다. “지연의 이유가 서로일 때, 진입을 돕는다.”

밤. 집에서 창을 열어두자, 먼 데서 종소리가 아주 약하게 들렸다. 서울역의 공시의 종이 아니라, 동네 교회의 늦은 연습인지도 모른다. 소리는 어제와 오늘 사이의 얇은 틈을 두드렸다.
탁자 위에, 낮에 시계공이 내게 쥐여준 작은 봉투가 놓여 있다. 뜯어보니 번역 식물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메모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간을 번역하려면, 말보다 먼저 숨부터 번역하세요.”

나는 씨앗을 물잔에 잠깐 담갔다가, 창가 분갈이한 화분에 묻었다. 토양을 덮으며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노동 종료. 관계 시작.”
그리고 문장 하나를 더 붙였고, 씨앗이 그것을 오래 기억하길 바랐다.
“관계가 시간을 만든다.”

침대에 누우니 손목이 가볍다. 맥박 스티커를 떼어낸 자리엔 작은 접착 자국만 남았다. 귀 안에서 심장이 일정하게 말한다. 도시가 그 리듬을 배워가고, 가끔은 내 리듬이 도시에 맞춰질 것이다.
내일 아침엔 어디로 호출이 올까. 연남동 번역 식물 온실일 수도, 경복궁 그림자 프린터일 수도, 아니면 강남의 광고 사라짐을 기억하려는 모임일 수도. 어느 쪽이든 나는 같은 가방을 들고 나갈 것이다.
장치가 아니라 서사를 운반하는 가방. 오늘 누군가에게서 벗어난 그 가방의 무게가, 내게로 살짝 옮겨 온 느낌이었다.

불을 끄면 창밖의 도시가 잠깐 어두워진다. 그러다 다시, 아주 작은 표지판처럼 켜진다. “유예 중.”
좋다. 우리는 잠깐 멈춰 서서, 서로의 시간을 번역하는 일을 배운다. 그게 이 도시에서 아직 남은, 그리고 방금 막 생겨난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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