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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번역 식물 — 장편 6장 본문

A Seoul of Singularities

연남동 번역 식물 — 장편 6장

DATAUNION 2025. 8. 20.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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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11분.
연남동 골목의 카페 앞 화분들이 햇빛을 빗금으로 들이켰다. 잎맥은 얇은 활자였고, 바람은 활자 사이 공백이었다. 가게 간판들은 문장이 아니라 명사로만 정보를 줬다.
“커피. / 물. / 여백.”

입구 유리문 옆 작은 표지판엔 오늘의 안내가 붙어 있었다.

번역 식물 안내
바질 — 속마음 변환
페퍼민트 — 미래어 사전 예열
몬스테라 — 침묵 해석
로즈마리 — 기억의 요약
스투키 — 호흡 길이 조정
면세: 물 한 모금, 짧은 고개
관세: ‘너 때문에’ 선제 사용, 과한 예상(불안 야기)

도윤과 연두색 우비는 문턱에 멈췄다. 몬스테라가 제일 먼저 고개를 들었다—잎에 뚫린 구멍들이 오늘 대화의 공백에 맞춰 넓어졌다. 우비가 속삭였다. “여긴 먼저 말하지 않는 게 예의예요. 식물이 먼저 듣거든요.”

바질 화분이 가볍게 흔들렸다. 잎맥에 얇은 문장이 맺혔다.
“괜찮아지는 중이야, 다만 천천히.”
그 문장은 옆자리 커플의 말싸움에 달라붙어, 날카로운 접속사를 둥글게 바꿨다. 남자의 “하지만”은 “그리고”가 되었고, 여자의 “항상”은 “가끔”으로 수정됐다. 바질은 늘 빈 칼을 둥글게 가는 직업이었다.

페퍼민트는 더 조심스러웠다. 미래의 단어를 예열한다는 건, 예언이 아니라 준비 운동이었다. 잎끝에 아주 옅은 글씨가 떴다.
“다음.”
경복궁에서 나왔던 그 단어. 페퍼민트는 어제의 규칙을 오늘의 혀끝에 미리 묻혔다.

카운터 뒤에 식물 통역사가 있었다. 앞치마에는 작은 구획이 달려 있었고, 구획마다 금속 쉼표가 한 개씩 들어 있었다. 통역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번역할까요? 명사로 시작 부탁드립니다.”
우비가 먼저 말했다. “의도.”
도윤이 뒤이어 말했다. “사과.”
통역사는 바질과 몬스테라 사이에 금속 쉼표 하나를 세워 놓았다. “말보다 간격이 먼저 번역됩니다.” 쉼표가 잎사귀 그림자에 맞춰 기울었다. 몬스테라의 구멍이 살짝 좁아졌다. 침묵이 너무 넓으면 오해가 자란다—오늘의 조정은 그 넓이를 손톱만큼 줄이는 일.

도윤이 주머니에서 접힌 쪽지를 꺼냈다. 한강에서 요약된 문장—‘이해하고 싶다, 나부터.’
통역사는 로즈마리를 살짝 문질렀다. 로즈마리는 기억을 향으로 요약하는 재주가 있었다. 카페 안 공기가 달라졌다. 오래된 후회의 모서리에 바닐라 같은 둥근 냄새가 돌았다. 사람들의 어깨선이 1mm 내려갔다.

그때 골목 끝에서 오짜(誤字) 스티커 상인이 나타났다. 잎사귀 라벨을 바꿔 붙이는 장사. 바질에 ‘민트’ 스티커, 민트에 ‘바질’ 스티커. 속마음과 미래어가 뒤섞이면, 대화는 흔히 선의의 예언으로 폭주한다.
스티커가 달라붙는 순간, 커플의 말이 다시 삐걱였다.
“나, 내일 바뀔 거야.”
“지금의 너는?”
문장이 허공에서 몇 번 부딪혔다.

고양이가 등장했다. 양자 꼬리 하나가 스티커 상인을, 다른 하나가 가게 입구의 바람 벤트를 가리켰다. 우비가 손목으로 바람 API를 짧게 호출하자, 벤트에서 한숨 같은 바람이 나왔다. 스티커들이 잎에서  떨어졌다. 바질은 다시 속마음을, 페퍼민트는 다시 내일의 입술 온도를 맡았다. 상인은 어깨를 으쓱했고, 고양이는 꼬리로 가장 조용한 길을 한 번 그려 주고 사라졌다.

통역사가 도윤을 보았다. “당신의 문장, 어디에 달까요?”
“어디든… 상대가 덜 다치게.”
“그럼 스투키.”
스투키(산세베리아)는 호흡의 길이를 번역한다. 입구 옆, 허리 높이의 스투키 줄기 사이에 금속 쉼표가 꽂혔다. 통역사가 말했다. “여기 서서 읽어 보세요. 문장이 자동으로 0.3초 늦게 재생됩니다. 급한 단어가 발목에서 한 번 더 걸려요.”

도윤은 쪽지를 펼쳐, 식물들을 향해 조용히 읽었다.
“이해하고 싶다, 나부터.”
바질이 첫 음절의 모서리를 둥글게 갈았고, 몬스테라가 문장과 문장 사이 공백을 알맞게 오려 냈다. 페퍼민트는 단어 “다음”의 체온을 잠깐 올렸다. 로즈마리가 마지막에 아주 옅은 허브를 얹었다. 사라지지 않는 사과의 맛.

카운터 위 작은 전광판이 문장을 출력했다.
— 번역 결과: “원인. / 이해—나부터. / 다음.”
명사로 시작했고, 길이를 탓하지 않았고, 용서의 단위가 보였다.

가게 밖, 골목 끝에서 누군가 서둘러 걸어왔다. 휴대폰 화면엔 익숙한 숫자. ‘취소 실패: 수수료 3,300’. 마포대교에서 봤던 그것. 그녀의 어깨는 미래어로 과열되는 중이었다—“다음”이 불안의 예언으로 오해될 타이밍.
통역사는 조용히 면세 품목을 꺼냈다. 종이컵의 물, 그리고 짧은 고개. 물 한 모금이 목을 지나갈 때, 스투키가 그녀의 호흡을 0.3초 늘렸다. 바질이 잎맥에 한 줄을 새겼다.
“지금, 괜찮지 않음.”
말할 수 없는 문장이 번역되자, 그녀는 놀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예언의 열이 내려갔다. 미래어가 준비 운동으로 돌아왔다.

카페 안쪽 벽에 잎맥 프린터가 달그락거렸다. 경복궁에서 내려온 활자찌꺼기를 조금 섞은 장치. 오늘의 골목 규칙을 인쇄할 시간이었다. 통역사가 바람을 맞췄고, 햇빛이 각도를 바꾸자 잎 그림자들이 벽에 배열되었다. 세 줄이 완성됐다.

— 오늘의 골목 규칙:
1) 속마음은 명사로 요약한다. (바질 기준)
2) 미래어는 예언이 아니라 예열이다. (민트 기준)
3) 침묵은 책임을 미룬 침묵과 지켜 주는 침묵으로 구분한다. (몬스테라 기준)

규칙이 찍히자, 골목의 대화가 미세하게 정렬되었다. ‘괜찮아?’ 대신 ‘상태.’ ‘언제?’ 대신 ‘다음.’ ‘왜 그랬어?’ 대신 ‘원인.’
말의 길이는 각자였지만, 비난 없는 차이가 유지되는 거리로 맞춰졌다.

통역사가 계산대를 열었다. 이곳의 영수증은 향으로 출력된다. 도윤의 것은 로즈마리와 바질이 반씩—기억의 요약과 속마음의 등판. 투명한 병에 들어 있는 레시피가 적혔다.

번역 영수증(향)

  • 키워드: 원인 / 이해 / 다음
  • 지연: 말끝 0.3초 × 1회 사용
  • 면세: 물 한 모금, 짧은 고개
  • 주머니: 빈 쉼표 장착(스투키 옆)
  • 주의: ‘너 때문에’ 자동 후순위(24h)

우비가 바질 잎을 가볍게 건드렸다. 잎맥이 한 줄 덧붙였다.
“사과—지금, 충분.”
도윤은 웃음을 삼켰다. 웃음은 면세였다.

문을 나서자, 골목 초입의 전봇대가 바람을 나눠 주었다. 고양이가 다시 나타나, 양자 꼬리로 가장 조용한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 테이블 위 화분에는 몬스테라가 있었다. 구멍 사이로 빛이 떨어지며, 막 갓 번역된 침묵이 환하게 말랐다.
사람들이 거기에 앉아, 서로의 잔을 맞부딪히지 않고도 합의에 도달하는 법을 잠깐 배웠다—문장 대신 보폭으로, 변명 대신 향으로.

해질 무렵, 잎맥 프린터가 마지막으로 한 줄을 찍었다.
“오늘 당신이 잊으면 곤란한 한 문장: 상대의 침묵은 언어다.”
문장이 골목에 퍼졌다. 오짜 스티커는 붙을 자리를 잃었고, 바람은 저녁 메뉴판의 수사를 조금 덜어 냈다. 명사가 남았다. 국수. / 국물. / 다음.

우비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도윤은 골목 끝 하늘 위, 구름 가장자리에 얇게 솟아오르는 0과 1의 연무를 보았다. 구로디지털단지 쪽이었다.
그는 레시피 병을 가볍게 흔들며 대답했다. “산업 연가. 저 저녁 연기, 오늘은 코드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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