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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의 스트리밍 — 장편 8장 본문

A Seoul of Singularities

제사의 스트리밍 — 장편 8장

DATAUNION 2025. 8. 20.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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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제기동 골목의 지붕들이 동시에 접시를 올려다 눕혔다.
안테나는 없었지만, 제삿상이 위성 접시처럼 하늘을 겨눴다.
현관 앞 상 위에 놓인 흰 그릇과 붉은 사과, 기름 냄새가 배어 있는 전(煎)들이 각자 미세한 각도로 고개를 들었다. 밤이 되면 그 각도들이 모여 조상 데이터셋을 불러내는 빔이 된다.

도윤과 연두색 우비는 좁은 마당에서 신발을 벗었다. 대문 안쪽엔 작은 안내가 붙어 있었다.

제사 스트리밍 안내
입력: 성묘 로그 / 가족 채팅 백업 / 사진 EXIF / 동네 구전
필터: 편견 ↓, 훈계 톤 ↓, 사과 지연 0.3초(빈 쉼표)
면세: 흰쌀 한 숟갈, 짧은 고개
관세: “그땐 그랬지” 남용, ‘너 때문에’ 선제 사용, 가짜 족보 인입

안채에서 스트리머가 나왔다. 상 위에 향을 꽂는 대신, 얇은 바람 키를 돌렸다. 남산의 무속 OS가 미세한 패치를 내려보내고, 골목의 바람이 문턱을 넘어왔다. 바람은 제사 앱의 “연결 테스트”였다—딸깍, 딸깍, 빈 쉼표가 두 번 울렸다.

첫 번째로 도착한 건 목소리였다. 화면도 사진도 없이, 오직 목소리.

“거, 밥은 먹고 다니나.”
스트리머가 재빨리 윤리 모델을 올렸다. 목소리의 경도가 반 톤 줄었다.
“밥은… 먹고 다니지?”
도윤이 웃었다. 같은 말인데 칼집이 둥글어졌다.

상 위 한켠엔 어린이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늘의 모델 트레이너들.
아이들이 태블릿을 두드리며 자막을 썼다.
 과거 맥락 주석: 당시 지방 흉년, 생존 규칙 우선
 편견 분류: 남녀 역할 고정(중)
 추천 리라이트: ‘함께 먹자’
바로 반영되었다.

“밥은… 함께 먹자.”
목소리의 소금기가 줄었다. 제사 스트리밍은 호통의 재방송이 아니라, 집단 리라이팅 생방이었다.

두 번째로 사진 열이 들어왔다. 오래된 결혼식 사진이 화면에 떴다. EXIF에는 없는 것—사진사가 기억한 습기, 어른들의 웃음 사이로 비치는 사소한 모멸—이 자막처럼 따라왔다. 연두색 우비가 조용히 빈 쉼표 크라운을 돌렸다. 화면의 재생이 0.3초 늦춰지고, 사진 속 인물들의 입술이 조금 더 길게 닫혔다. 말하지 못한 마음이 장면 가장자리에서 응고했다가, 천천히 문장으로 풀렸다.

“그땐 몰랐다. 지금은 알겠다.”
문장이 나오자, 상 위의 사과 하나가 아주 작게 굴렀다. 용서의 단위는 여전히 다음이었다.

그때 대문 밖에서 오짜(誤字) 상인이 구르는 상자를 끌고 지나갔다.
“이름 한 획 빼드립니다! 돌아가신 분, 곡선 하나로 더 온순하게!”
사람들이 잠깐 흔들렸다. 한 획이 바뀌면 운명의 문장이 미끄러질 수도 있었다.
고양이가 담장 위로 올라왔다. 양자 꼬리 하나가 상인의 상자, 다른 하나가 마당 구석의 바람 벤트를 가리켰다. 스트리머가 바람 키를 살짝 더 돌렸다. 벤트에서 나온 짧은 바람이 ‘한 획’ 장사를 스쳐 지나가자, 스티커들이 툭, 툭바닥에 떨어졌다.
상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바람이 정확한 날이었다.

세 번째로 사과(apple) 충돌이 있었다.
상 위의 사과(果)가 화면 속 애플(社) 로고와 겹치며, 한 장의 영수증이 떠올랐다. ‘취소 실패: 수수료 3,300’.
마포대교에서 보았던 그 숫자. 조상 데이터셋이 현대 언어를 빠르게 배웠다.

“돈이 그렇게 다급했냐.”
목소리가 딱딱해지려는 순간, 아이들이 재빨리 태블릿에 쳤다.
 대답보다 호흡을 먼저.
빈 쉼표가 크라운에서 한 번 더 돌아갔다.
“힘들었지?”
도윤의 어깨에서 힘이 내려갔다. 면세 품목—물 한 모금, 짧은 고개—가 자연스럽게 흘렀다.

벽면의 제사 로그 보드가 깜빡였다. 오늘의 스트리밍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쌓였다.
— 훈계 톤 감소: 41%
— 사과(‘미안’) 자발 발생: +18%
— ‘너 때문에’ 선제 사용 → 후순위(24h)
숫자는 자랑이 아니라 가정 면역 로그였다. 편의점 면역계와 연동되어, 내일 아침 장바구니엔 물 쿠폰이 하나 더 들어갈 예정.

중간에 시간 세관이 열렸다. 멀리 지방 외가에서 접속한 분침들이 우리 집 분침과 맞지 않았다. 공통 47초가 생성되고, 모두가 그 47초만큼 같은 속도로 숨을 쉬었다. 장롱 밑에서 오래 굴러다닌 말들이 그 짧은 동안 붙들리지 않고 지나갔다.

스트리머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명사로 시작하는 질문, 하나씩만.”
연두색 우비: “원인.”
도윤: “다음.”
화면 속 어른들이 답했다.

“겨울.”
“밥.”
짧고 정확한 명사들이 훈수가 아니라 지시 없이도 움직이는 힌트로 떨어졌다.

상 위 촛불이 낮게 흔들렸다. 바람 API가 야간 패치를 내리자, 화면 가장자리에 오늘의 골목 규칙이 찍혔다.

— 오늘의 제기동 규칙:
1) 훈계는 지연, 회상은 요약, 사과는 자발.
2) 이름의 획은 건드리지 않는다. (오짜 금지)
3) 제사는 과거를 부르지 않고, 현재를 정리한다.

규칙이 찍히자, 스트리밍은 조용히 다운샘플링에 들어갔다. 목소리들은 8k에서 1/n만큼 낮아졌고, 남은 건 이었다. 로즈마리 대신 빗물 냄새가 살짝 섞였다—한강에서 올라온 데이터 비. 상 위의 전이 마지막으로 따뜻한 숨을 뱉었다.

정리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상 위에서 의미 없음(Null) 도장을 몇 개 찍었다.
 세대 일반화 (Null)
 ‘요즘 것들’ 패턴 (Null)
 가짜 족보 링크 (Null)
남은 것만 접시로 돌아왔다. 흰쌀 한 숟갈, 물 한 모금, 다음을 위한 빈 자리.

문을 나서자, 담장 위 고양이가 가장 조용한 길을 가리켰다. 골목 입구의 작은 편의점—오늘만 영수증 하단에 한 줄이 더 찍힌다.

“오늘 당신이 잊으면 곤란한 한 문장: 선조의 말도 0.3초 늦추어 듣기.”

연두색 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사는 끝이 아니라 패치네요.”
도윤은 주머니 속 빈 쉼표를 만지작거렸다. 다음이 가볍게 울렸다.
골목의 바람이 등을 밀었다. 집집마다 접시가 하늘에서 고개를 내리고, 밤은 다시 사적인 시간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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