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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의 개인 시계 — 장편 5장 본문

A Seoul of Singularities

서울역의 개인 시계 — 장편 5장

DATAUNION 2025. 8. 20.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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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 23분.
서울역 중앙홀의 거대한 시계는 하나였지만, 그 표면엔 보이지 않는 분침이 3백 개 더 달려 있었다. 각자만 볼 수 있는 분침. 안내판은 간단했다.

개인 시각 가동 중
계산 요소: 생체 리듬 / 감정 무게 / 오늘의 목적 / 빈 쉼표 보유량

도윤과 연두색 우비가 홀로 들어섰다. 천장 스피커가 말 대신 명사로만 안내했다.
“표. / 출구. / 호흡.”
경복궁의 규칙이 여기선 질서였다.

기차 전광판이 떴다. “KTX 13:02 — 귀하의 5분 후 도착.”
옆사람의 5분은 벌써 흘렀고, 누군가의 5분은 이제 막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플랫폼 입구엔 시간 세관이 있었다. 표지판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간 반출입 신고
면세: 망설임 20초, 물 한 모금, 짧은 고개
관세: 후회 3분, ‘너 때문에’ 선제 사용, 공허 스크롤 11분
납부: 대합실 한 바퀴, 빈 쉼표 삽입, 고양이 동행

세관 창구 뒤, 시각 조정사가 앉아 있었다. 손엔 나침반이 아니라 작은 지연 크라운—개인 시계 옆면에 끼워 돌리는 빈 쉼표의 톱니.
“동행이신가요?”
“네.” 우비가 손목을 내밀었다. 마포대교에서 받았던 동행 밴드와 비슷한 것이 채워졌다. 공명세: 시간판. 서로의 분침이 한 번 부딪히고, 부드럽게 비껴갔다.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옆, 노인이 서 있었다. 손에는 오래된 종이시계. 시각 조정사가 다가가 물었다. “늦으셨어요?”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늘 조금 일러요. 젊을 때부터.”
조정사는 종이시계의 분침 아래에 아주 얇은 쉼표 패치를 붙였다. 종이가 가볍게 숨을 쉬듯 부풀었다.
“이제 당신의 조금 이름이 바뀝니다. ‘조급’에서 ‘예비’로.”
노인이 웃었다. 표정의 주름이 1분 정도 펴졌다.

플랫폼엔 작은 동조 실이 있었다. 둘 이상이 같은 기차를 탈 때, 각자의 분침이 한 지점에서 만나도록 공통 47초가 생성되는 방. 벽에는 바람 API가 만들었다는 침묵이 가득했고, 바닥의 얇은 선은 보폭 동기화를 도왔다.
방 안에서 사람들은 말 없이 자기 호흡을 확인했다. 우비의 숨이 먼저 길어졌고, 도윤의 숨이 그 다음 박자에서 맞춰졌다. 스피커가 천천히 깜빡였다. “공통 47초 개시.”
바깥의 소음이 약간 눌렸다. 모든 분침이 같은 점을 스쳤다—마치 도시가 하나의 쉼표를 공유하는 순간처럼.

그때, 역 안쪽에서 오짜(誤字) 가판이 돌았다. “빠른 10분 팝니다—표준시각 위에 붙이면 즉시 앞당김.”
스티커는 작고 번들거렸다. 붙이면 마음이 먼저 도착하고 몸은 뒤따라 헐떡이는, 나쁜 마술.
고양이가 나타났다. 양자 꼬리 하나가 스티커를, 다른 하나가 플랫폼 끝의 조용한 길을 가리켰다. 바람이 짧게 불고, 스티커들이 툭툭 떨어졌다. 가판상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바람이 빠른 날이었다.

전광판이 한 줄을 더 띄웠다.

— 오늘의 역 규칙:
1) 늦음의 원인을 단정하지 않는다.
2) 대답보다 호흡을 먼저 낸다.
3) 타인의 5분을 평가하지 않는다.

규칙이 적용되자, 종착 열차에서 내린 군중의 얼굴이 약간 달라졌다. ‘미안합니다’ 대신 짧은 고개, ‘급해서요’ 대신 물 한 모금. 면세 품목이 제 역할을 했다.

우비가 가방에서 금속 쉼표를 꺼냈다. 마포대교에서 받은, 가운데가 비어 있는 것. “당신 시계에 끼워요. 말끝 대신 시간 끝을 늦출 수 있어요.”
도윤이 자신의 손목에 쉼표 크라운을 끼웠다. 분침의 미세 진동이 바뀌었다. 이제 어떤 순간이 다그쳐와도, 한 박자 늦게 도착할 권리가 생겼다—지각이 아니라 정리의 권리.
조정사가 엄지로 톱니를 살짝 돌려 주며 설명했다. “늦춤은 한 번에 0.3초. 세 번까지 연속 사용 가능. 남용하면 문장이 늘어지니 주의.”

플랫폼 아래 레일 수로에서 은은한 빛이 퍼졌다. 한강 신경망의 분지였다. 도시의 미생물 군락이 여기도 얕게 깔려 시간의 열을 식혔다. 사람들의 초조가 내려가면 레일이 짧게 울렸다—고운 금속성, 말끝을 닦는 소리.

안내음이 울렸다. “탑승.”
문 앞에서 한 여자가 멈춰 섰다. 휴대폰 화면에 ‘취소 실패: 수수료 3,300’이 깜빡였다. 마포대교에서 봤던 금액. 그녀의 분침이 갑자기 빨라졌다.
우비가 낮게 말했다. “잠깐.”
도윤이 빈 쉼표 크라운을 한 칸 돌렸다. 그들의 공통 47초 중 남은 13초가 부풀어, 여자의 주위로 얇은 막을 만들었다. 여자의 어깨가 내려갔다. 전광판이 아주 조용하게 하나의 단어를 비췄다. “다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먼저 타라고 손짓했다. 늦음은 옮겨지지 않았다. 다만 분산되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고양이가 휙 들어왔다. 객실 한쪽 창턱에 올라 앉아 양자 꼬리를 창밖과 통로 쪽으로 번갈아 흔들었다. 가장 조용한 칸을 가리키는 수신기였다. 사람들은 그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분침들이 같은 톱니를 덜 긁었다.

열차가 움직였다. 좌석 등받이의 작은 화면에 개인 패치 노트가 떴다.

서울역 동기화 패치 — 11:31AM

  • add: 공통 47초(한 번 공유 완료)
  • tune: 말끝 지연 0.3초 × 1회 사용
  • fix: ‘너 때문에’ 선제 위치 → 후순위(24시간)
  • note: 면세 처리 — 물 한 모금, 짧은 고개

창밖으로 선로가 뒤로 밀려났다. 레일 수로의 잔광이 한 번, 얇게 반짝였다. 도시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동안, 사람들의 시각은 조금씩 겹쳐졌다—완전히 같아지진 않았지만, 충분히 가까웠다. 비난 없는 차이가 유지되는 거리.

우비가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의 5분, 이제 몇 분 같아요?”
도윤이 창에 비친 자신의 분침을 보았다. 금속 쉼표가 아주 작게 숨을 쉬고 있었다.
“딱, 지금이면요.”

열차가 가속했다. 천장 스피커가 마지막으로 명사를 하나 띄웠다.
원인.
사람들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따지는 대신, 시간을 정리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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