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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그림자 프린터 — 장편 3장 본문
정오가 다가오자, 하늘은 인쇄기를 연마하듯 맑아졌다.
흥례문 마당의 돌바닥은 종이였고, 처마의 단청 문양은 활자였다. 바람은 잉크 역할을 맡았다—먼지와 냄새, 아침 대화의 미세 입자들을 실어 나르며.
도윤과 연두색 우비는 그림자 경계선 바깥에 서 있었다. 바닥에는 얇은 실선들이 교차해 있었다. 어제의 규칙이 사라진 자리, 새 문장이 놓일 배치표였다. 관리인은 수문장 복장을 했지만, 손엔 깃발 대신 측광계를 들고 있었다. 이름표엔 ‘그림자 조형사’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 글자폭은 얼마죠?” 연두색 우비가 물었다.
조형사가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햇빛을 한 번 접었다 펴며 말했다. “짧고 두껍게요. 도시가 과로였는지, 긴 문장엔 반응이 둔합니다.”
경복궁의 그림자 프린터는 세 요소로 문장을 만든다.
첫째, 처마가 만드는 기본 획.
둘째, 은행잎의 떨림이 만드는 부수.
셋째, 사람들의 몸이 더하는 마지막 획.
오늘은 세 번째가 특히 중요하다고 했다. “문장의 마지막 획은 누가 써야 하죠?” 도윤이 묻자, 조형사가 웃었다. “항상 지나가던 사람이요. 우연이 책임을 지면 도시가 덜 뻗습니다.”
정오 알림이 북소리로 울렸다. 순간, 하늘이 약간 더 가까워졌다. 처마 끝에서 길게 뻗은 그림자들이 바닥의 배치표 위를 찾아가 앉았다. 은행잎들이 잔 떨림으로 점과 획을 찍었다. 흩어진 먼지들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더니, 갑자기 문장처럼 정렬되었다. 첫 줄이 나타났다.
— 오늘의 궁 규칙: “질문은 명사로 시작한다.”
사람들 사이로 작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규칙이 도시로 전파되면, 안내문과 채팅창과 회의록의 첫 문장이 약간씩 변한다.
“왜 그랬어요?” 대신 “원인.”
“언제 할까요?” 대신 “시간.”
문장이 명사로 시작되면, 감정의 앞머리가 약간 눌린다. 경복궁의 고요가 도심의 첫 문장에 파묻히는 걸 막기 위해—조형사는 그렇게 설명했다.
둘째 줄이 아직 비어 있었다. 마지막 획이 필요했다. 조형사가 조용히 외쳤다. “마지막 획, 한 분만!”
그 순간, 한 아이가 경계선 안으로 살짝 뛰어들었다. 손에 들린 것은 소형 종이학. 아이는 종이학 그림자를 바닥에 눌러 한 획을 그었다. 종이학의 부리가 묵직한 세로획처럼 찍혔다. 둘째 줄이 완성되었다.
— “용서의 단위는 ‘다음’이다.”
연두색 우비가 웃었다. “명사로 묻고, 다음으로 건너가라는 뜻이네요. 오늘은 실험실이 아니라 복도 같은 하루겠어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포대교에서 받은 빈 쉼표가 주머니 속에서 가볍게 움직였다. 다음이라는 단어 옆에서 쉼표가 잠깐 반짝인 것 같았다.
그런데 셋째 줄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림자가 겹치며 자꾸 ‘ㅅ’이 ‘ㅈ’으로 왜곡되는 것이다. 조형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불법 오짜(誤字) 스티커가 또 붙었네요.”
경계선 바깥에서 검은 비닐을 팔던 남자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오늘의 규칙’에 오탈자를 끼워 넣는 장사꾼들—규칙은 사람들이 따라 줄 때만 규칙이니, 작은 오타도 도시를 비스듬하게 만든다.
조형사가 깃발 대신 바람 API를 호출했다. 남산에서 가볍게 수정된 바람이 문장 위를 스쳤다. 은행잎들이 한 번에 같은 방향으로 눕고, 처마 그림자의 모서리가 매끈해졌다. 그래도 마지막의 ‘ㅅ’이 약간 흔들렸다. 조형사가 관람객을 향해 고개를 든 순간, 무언가가 그림자 사이를 가로질렀다.
고양이였다. 양자 꼬리 하나가 현재를 가리키고, 다른 하나가 사람들 발목 사이 가장 조용한 길을 찾고 있었다. 고양이는 마지막 줄의 ‘ㅅ’ 자리에 정확히 앉았다. 꼬리가 두 번 흔들리며 획을 고정했다. 햇빛이 한 박자 늦게 따라 내려와, 흔들림이 멈췄다. 셋째 줄이 드디어 찍혔다.
— “오늘은 문장의 길이를 탓하지 않는다.”
세 줄의 규칙이 완성되자, 마당의 공기가 얇아졌다가 다시 두꺼워졌다. 휴대폰 알림이 동시에 울렸다. ‘경복궁 그림자 프린터: 규칙 적용 시작.’ 시내 곳곳의 전광판들이 일제히 명사로 시작했다.
“회의.”
“점심.”
“다음.”
짧은 명사들이 도시의 박동을 정돈했다.
조형사가 깊게 숨을 쉬었다. “끝났습니다. 오늘은 잘 찍혔네요.”
연두색 우비가 묻자,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규칙은 24시간 후 사라져요. 오래 두면 딱딱해지거든요. 서울은 흐르는 규칙만 받아들입니다.”
도윤은 바닥의 잔상들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각도를 바꾸면서 문장들이 옅어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돌바닥 깊숙이, 아주 얇은 수평선처럼 매달려 있었다. 필요한 순간, 사람들의 발목 밑으로 떠올라 보폭을 정리해 줄 것이다.
관람객들이 흩어졌다. 아이는 종이학을 접어 조형사에게 건넸다. “내일도요?”
조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마지막 획을 써요. 우연이 돌아가면서 책임을 져야 하니까.”
아이의 어깨 위로 햇빛이 기울었다. 종이학의 그림자가 잠깐 비둘기처럼 보였다가, 다시 학으로 돌아왔다.
연두색 우비가 속삭였다. “명사로 시작하는 하루면, 변명은 조금 늦게 도착하겠죠.”
“늦게 도착하는 변명은, 가끔 도착 안 하기도 하죠.” 도윤이 주머니의 빈 쉼표를 만지작거렸다. 다음이라는 단어가 그 옆에서 조용히 눌렸다 펴지는 기분. 그는 스스로에게 짧게 말했다. “원인. 다음.”
정오가 지나자, 프린터는 조용히 닫혔다. 처마의 활자는 다시 성곽의 장식으로 돌아가고, 은행잎은 그저 잎이 되었다. 다만 그림자 아래엔 아주 얇은 활자찌꺼기가 남았다. 고양이가 발바닥으로 그것을 살짝 긁어 모아, 난간 아래 작은 틈으로 밀어 넣었다. 도시의 고양이 활판공이 하는 일은 대부분 눈에 띄지 않는다—오타가 생기지 않게, 문장이 미끄러지지 않게.
궁 밖으로 나오는 길, 매표소 옆 전광판이 오늘의 문장을 다시 한 번 짧게 비췄다.
“질문은 명사로 시작한다. 용서의 단위는 ‘다음’이다. 오늘은 문장의 길이를 탓하지 않는다.”
도시는 그 세 줄을 들고 오후로 들어갔다. 회의실에서, 채팅창에서, 마포대교의 난간에서—사람들은 한 박자 늦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늦음이 약속처럼 느껴졌다.
—
다음 장면, 동대문 새벽 알고리즘으로 갈까요, 아니면 연남동 번역 식물로 걸음을 옮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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