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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변 — 장편 1장 본문

A Seoul of Singularities

한강 변 — 장편 1장

DATAUNION 2025. 8. 20.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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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12분. 한강은 검은 유리였다.

수면 아래 형광 미생물 군락이 맥박을 보내고, 떼지어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그 신호를 옮겼다. 패킷 라우팅. 물결은 아주 얕은 전자음으로 대화했다.

도윤은 잠깐 멈춰 섰다. “과거 투척 금지” 표지판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접힌 쪽지를 꺼냈다.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 없는 문장 하나. 던지고 싶었지만, 법이 바뀌었다. 과거는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백업한 뒤 필요한 때에만 스트리밍해야 한다. 강은 요즘 감정 과부하로 수위가 불안정했다.

강변에는 밤낚시꾼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낚싯바늘 대신 가느다란 문장을 꿰어 던지는 사람들—프롬프트 캐스팅.
“오늘은, 처음처럼.”
“실패를, 실패하지 않게.”
좋은 문장은 깊게 가라앉고, 나쁜 문장은 물수제비처럼 튀다 사라졌다. 어떤 이는 시를 낚았고, 어떤 이는 낚싯대 끝에서 자기 어젯밤을 끌어올렸다. 옆자리 노파는 미끼 대신 쉼표 하나를 던졌다. 금빛 물고기가 살짝 올라왔다가 물표면에 동그라미를 남겼다. 노파가 중얼거렸다. “쉼표가 제일 비싼 미끼지.”

도윤은 쪽지를 다시 접었다. 던질 수 없다면, 재생이라도.
그는 우산을 폈다. 비가 오진 않았지만, 한강의 새벽안개는 데이터였다. 우산 안감의 얇은 회로가 활성화되며 옅은 문장들이 맺혔다. 복호화가 시작되자, 우산의 살마다 다른 목소리가 떨렸다.

—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 “다음에는 나를 먼저 물어볼 것.”
— “미안하다고 말하는 연습.”

도윤은 우산을 접었다. 지나치게 정확한 조언은 아직 부담스러웠다. 편의점 불빛이 물 위로 길게 드리웠다. 도시의 면역계—영수증 하단에 오늘도 ‘루머 21건 무해화’ 같은 로그가 찍힐 것이다. 유리문 옆엔 작은 자동기둥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감정 세관: 과도한 분노 소지 시 마포대교로 우회 안내.’ 여름밤을 건너온 분노의 잔열이 여기서 자주 발견되곤 했다.

그때 강 중류에서 잔광이 퍼졌다.
물속 미생물 군락이 임계점을 넘길 때 생기는, 도시의 신경발작 같은 반짝임. 낚시꾼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강이 “깊게 숨”을 쉬며, 수면 아래로 큰 문장을 통째로 보내는 소리였다. 전광판은 아무 광고도 띄우지 않고, 단 한 줄 문장을 새겼다.

— 오늘의 강 규칙: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는다.

강바람이 바뀌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짧아지고, 채팅창들이 절약 모드로 들어갔다. 말끝이 둥글게 닫히는 소리. 쓸데없는 반복이 사라지자, 이상하게도 물비늘이 더 촘촘해 보였다.

러너들이 스쳐 갔다. 각자 다른 ‘개인 시각’에 맞춰 달리는 사람들—누군가의 4시 12분은 다른 누군가의 9시 48분이었다. 도윤은 자신의 분침을 잠깐 확인했다. 오늘의 ‘너비’는 넓었다. 천천히 걸어도 괜찮은 날.

강가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긴 우비, 빈 구두 한 켤레, 그리고 허공에 메모를 쓰는 동작.
그녀는 손가락으로 공기를 긁어 문장을 남겼다.
<강은 오늘 꿈을 꾼다.>
<필요 없는 기억은, 요약해서 묻는다.>
<요약 담당: 연두색 우비.>

도윤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약관이에요. 과거, 바로 버리면 강이 체한다니까. 최소 단위로 압축해서 심프—아시죠? 쉼표요.”
그녀가 작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금속 쉼표들이 반짝거렸다. 플래시 드라이브 같은, 아주 얇은 메모리.
“한 사람당 오늘은 하나까지. 문장을 달고 오세요.”

도윤은 쪽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지나쳤다.’
연두색 우비가 읽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길다. 의도도 겹치고.”
그녀는 손톱으로 문장을 다듬기 시작했다. 단어 몇 개를 걷어내고, 남은 것을 뒤집고, 쉼표 자리를 옮기고.
“이렇게 어때요.”
그녀가 금속 쉼표에 새긴 문장은 이랬다.
‘이해하고 싶다, 나부터.’

무게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도윤은 숨을 내쉬었다.
요약관이 말했다. “이걸 강바닥의 쉼표층에 묻어두면, 필요할 때만 고양이들이 파와요.”
“고양이요?”
그녀는 장난스런 얼굴로 강둔덕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고양이 몇 마리가 움직였다. 양자 꼬리—하나는 현재를, 다른 하나는 가장 조용한 미래를 가리키는 꼬리—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한 마리가 다가와 쉼표를 툭 건드렸다. 허락이라는 뜻이었다.

둘은 물가로 내려갔다. 한강의 신경이 여기선 느리게 뛰었다.
요약관이 금속 쉼표를 살짝 수면 아래 밀어 넣자, 물고기들이 그 주위를 둥글게 맴돌았다. 마치 캐시를 비우듯, 물이 깊게 맑아졌다.

잠시.
도시는 언젠가 같은 말을 속삭이며 7분간 잠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누군가가 말을 끝낼 때면, 보이지 않는 쉼표가 하나 따라붙는다—말을 다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합의.
도윤은 그 합의를 믿어 보기로 했다.

멀리, 마포대교가 천천히 늘어났다. 화살표처럼 긴 푸른빛. 누군가 아직 식지 않은 분노를 들고 건너는 중이었다. 다리가 늘어날수록, 강바람은 길어졌다. 도시의 숨이 고르게 맞춰졌다.

“저거, 감정 세관에서 우회시킨 분이겠죠?” 도윤이 물었다.
요약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빠지면, 다리도 줄어들어요. 문제는… 요즘 줄어드는데 시간이 길다는 거.”
“그래서 강이 요약을 배운 거군요.”
“네. 사람 대신 먼저 배워버렸죠.”

편의점 자동문이 들렸다. 새벽 배송 로봇이 두 대 나와 천천히 물가를 따라 걸었다. 박스 측면에 작은 문장이 스크롤됐다. ‘오늘 당신이 잊으면 곤란한 한 문장: 몸에 물 넣기.’
도윤은 웃었다. 강이 건넨 농담 같았다.

연두색 우비가 물기를 털며 물었다. “한 장 더 요약할래요?”
도윤은 망설였다. 허공에 써진 문장들이 떠올랐다. 마포대교의 늘어진 빛, 강의 신경, 쉼표층, 고양이의 두 번째 꼬리. 그리고 아직 보내지 못한 메시지 하나.

그는 우산을 다시 펼쳤다. 이번엔 비가 정말로 내리고 있었다. 각 우산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재생했다.
도윤의 우산은 한동안 조용하다가, 아주 단순한 문장을 내보냈다.
— “지금이면 충분하다.”

그는 우산을 접고, 금속 쉼표 하나를 손바닥에서 굴렸다.
한강 바람이 그것을 가져갔다. 짧고 정확한 무게.
도시는 여전히 거대했고, 여전히 실험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놀랍게 작았다. 손 안에 들어오는 크기. 쉼표 하나만큼.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회색.
강은 또 한 번 숨을 깊게 쉬었다. 규칙이 갱신됐다.
— 오늘의 강 규칙: 서로의 속도를 비난하지 않는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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