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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대교 감정 세관 — 장편 2장 본문

A Seoul of Singularities

마포대교 감정 세관 — 장편 2장

DATAUNION 2025. 8. 20.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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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대교의 금속은 새벽 내내 몸을 늘였다 줄였다 했다.
푸른 안내광이 다리의 경계선을 따라 흘러가다가, 누군가의 분노를 감지하면 길게—지연의 리본처럼—뻗어 나갔다. 자동차 전용 차선 위로 얇은 투명막이 내려오고, 보행자 쪽에는 ‘신고대’가 펼쳐졌다. 표지판은 간단했다.

감정 반출입 신고
면세 한도: 서운함 2단어, 실망 1장면
관세 품목: 분노, 모욕, 자기 경멸
납부 방식: 걸음, 숨, 쉼표(금속)

도윤과 연두색 우비가 다리 입구에 섰다. 바람은 물 냄새와 철 냄새를 반씩 섞어 들려주었다.
신고대 안에는 세관원들이 있었다. 흰 장갑 대신 얇은 센서 반창고를 엄지와 검지에 붙인 사람들, 그리고 몇 마리의 고양이. 고양이들의 양자 꼬리는 유리처럼 갈라져, 한 줄은 강 쪽으로, 한 줄은 도시 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대기열 위에는 전광 문장 하나가 흐르다 멈췄다.

— 오늘의 다리 규칙: 대답보다 호흡을 먼저 낸다.

이어서 파란 불이 길게 번쩍였다. 다리가 느리게 늘어나는 신호. 복도 끝에서 한 남자가 걸어 왔다. 검은 셔츠, 구겨진 영수증 두 장, 전화기를 움켜쥔 손등에 흰 이빨 자국.
세관원이 고개를 들었다. “신고 품목?”
남자가 멈칫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세관의 음성 인식은 고의로 약간 크게 반복했다.
“분노, 원인 불명. 지속 시간 19시간.”
“마감?”
“없음.”
세관원은 목걸이형 디스플레이를 만졌다. 화면에는 ‘분노 관세율: 0.7 걸음/초’가 떠올랐다. “우회요청 승인. 장화 필요하십니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발밑 바닥에 보이지 않던 길이 열렸다. 미세한 구슬 같은 공감 센서가 유리 속에서 반짝였다. 남자가 첫 걸음을 떼자 다리는 한 뼘 더 길어졌다. 강물도 동시에, 아주 조용히 길어졌다.

“저 사람, 혼자 보내는 건가요?” 도윤이 물었다.
세관원이 둘을 훑어보고 말했다. “동행 신청 가능. 동행인은 감정 관세 면제, 대신 공명세 부과.”
“공명세?”
“타인의 감정과 동조될 확률. 걷는 동안 당신의 몸이 그의 열을 흡수하면, 오늘 밤 발목이 약간 붓습니다. 내일까지 빠집니다.”
연두색 우비가 먼저 손을 들었다. “신청이요.”

동행용 손목밴드가 둘의 피부를 감쌌다. 밴드는 맥박을 서로에게 번역해 들려주었다. 바늘구멍만 한 스피커에서 작은 음들이 났다—도윤의 숨은 낮고 길게, 연두색 우비의 숨은 물결처럼 빨랐다.

다리는 걷는 만큼 늘어나는 구조였다. 분노의 열은 바닥 패널 아래로 내려가, ‘냉각층’이라 불리는 얇은 수로를 따라 강으로 흘렀다. 그 길에는 수중 미생물 군락이 자라며 열을 분해하고, 문장들을 염으로 바꾸었다. 강의 신경이 가끔 눈을 번쩍 뜨듯 반짝였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다리 중간쯤에서 전광 안내가 다시 켜졌다.

감정 세관 확인
불법 반출입 목록: 타인의 말을 가장한 자기 변명, 선택적 기억 편집물, ‘너 때문에’로 시작하는 문장.
면세 품목: 물 한 모금, 타인의 수고에 대한 짧은 고개.

연두색 우비가 주머니에서 금속 쉼표 하나를 꺼냈다. “혹시 필요하시면.”
남자는 쉼표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 거예요.”
목의 힘줄이 꿈틀거렸다. 그의 손에 쥐어진 영수증이 바람에 흔들렸다. 한 장에는 “교환 불가”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다른 한 장에는 카드사 로고와 함께 ‘취소 실패’가 있었다. 네모칸 속, 작게 ‘수수료 3,300’.
연두색 우비가 낮게 중얼거렸다. “소액의 모멸.”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의 진짜 큰 상처는 대개 단가가 낮았다.

세 사람의 발 아래로, 바닥 패널이 천천히 밟히며 발열을 흡수했다. 발열량이 일정 기준을 넘으면, 다리 난간에서 얄팍한 바람 포켓이 터졌다. ‘바람 API’의 간이 호출이었다. 무속 OS의 작은 패치가, 화를 내려놓는 제스처를 추천했다.
남자가 그 바람을 한 번 움켜쥐더니, 소리지르듯 말했다. “나는—”
세관 스피커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대답보다 호흡을 먼저 내십시오.”
남자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한번, 두 번. 전광판의 파란 게이지가 조금 내려갔다. 다리의 팽팽한 긴장이 반 톤 풀렸다.

걷는 동안, 바닥 패널에는 작은 문장들이 스스로 증발해 떠올랐다. 남자가 지금까지 하루 동안 마음속에서 반복 재생하던 구절들이었다.
 “왜 나만.”
 “말을 말자.”
 “이런 게 세상이야.”
각 문장 옆에는 치수처럼 숫자가 붙었다. 재생 횟수 47, 103, 12. 반복은 힘이다. 힘은 길이를 만든다. 길이는 시간을 잡아 늘린다.

연두색 우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요약 원하시면, 단어를 바꿔 드릴게요. ‘왜’ 대신 ‘무엇으로’, ‘나만’ 대신 ‘지금의 나로’ 같은 것들.”
남자가 비웃었다. “단어 몇 개 바꾼다고 바뀌면 쉬웠죠.”
세관원이 어디선가 나타나 넓은 모래시계를 건넸다. 시계 안의 모래는 모래가 아니라, 미세한 쉼표 조각이었다.
“이건 대체 세목입니다. 내용은 바꿀 수 없어요. 다만 순서를 바꿀 수는 있습니다. ‘너 때문에’가 앞에 오면 다리가 늘어나고, ‘나는’이 앞에 오면 다리가 줄어듭니다.”
남자가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쉼표들이 아래로 떨어지며 잠깐 문장을 만들었다.
“나는, 너 때문에,
나는, 너 때문에,
나는—”
떨어지는 쉼표의 리듬이 호흡과 맞물렸다. 전광판의 게이지가 다시 내려갔다.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남자의 발목을 스쳤다. 양자 꼬리 한 줄이 남자의 진행 방향을, 다른 한 줄이 난간 너머 어딘가를 가리켰다. 고양이는 잠깐 멈추더니, 갑자기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질러 갔다. 다리의 길이가 미세하게 수축했다.
세관원이 수첩에 체크했다. “고양이의 조용한 길 추천이 떨어졌습니다. 이제부턴 ‘말 없는 구간’입니다. 70보 동안 말 금지.”
남자는 말없이 걸었다. 도윤과 연두색 우비도 따라 걸었다. 70보가 지나자 바닥 패널 위로 물기가 올랐다. 냉각층에서 올라온 차가운 수증기였다. 발열이 다 빠져나간 자리에서 길이 ‘탁’ 소리를 내며 짧아졌다. 아주 작은 탄성의 복귀. 사람 셋은 동시에 머뭇거렸다—다리가 동시에 조금 가까워졌으니까.

“이제 관세 정산합니다.” 출구 쪽 세관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진공판이 있었다. 표면에 오늘의 문장들이 박음질처럼 찍혀 있었다. 물 한 모금—면세 처리. 고양이 동행—공명세 감면. “나는” 선제 사용—길이 환급.
남자는 마지막으로 영수증 두 장을 내밀었다. “이건… 반입 금지겠죠?”
세관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영수증은 통과합니다. 다만 의미는 압수합니다.”
그는 영수증을 두 손으로 포개어 접더니, 손목의 스탬프로 도장을 찍었다. 의미 없음(Null). 붉은 글자가 서늘하게 번졌다. “실물은 지갑에 넣고 가세요. 대신 이걸 드릴게요.”
세관원이 내민 것은 아주 작은 금속 쉼표 하나였다. 연두색 우비의 것보다 얇고, 가운데가 비어 있었다.
“빈 쉼표입니다. 오늘 저녁, 말끝이 위험해질 때 이걸 떠올리면, 문장이 자동으로 한 박자 늦춰집니다.”

남자는 한동안 그 쉼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뜻밖에도 웃었다. 웃음은 관세 품목이 아니었다. 다만 ‘길이 환급’에 크게 기여했다. 다리가 마지막으로 한 번, 짧아졌다. 푸른 안내광이 숨을 고르듯 꺼졌다 켜졌다.

출구의 하늘 아래, 전광판이 오늘의 문장을 업데이트했다.
— 오늘의 다리 규칙: 이유 없는 화는, 이유 생길 때까지 다리에서 쉰다.

남자는 주머니에 빈 쉼표를 넣었다. 발목이 조금 무거워진 대신, 목덜미가 가벼웠다.
연두색 우비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공명세, 저희가 조금 냈네요.”
도윤이 발목을 돌려 보았다. 붓기는 있었지만, 통증은 아니었다. 도시가 말없이 문장 하나를 고쳐 쓴 날의 통증 같은 것—곧 빠지는 종류.

세 사람은 난간에 팔을 기대고 강을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새벽 배송 로봇이 한 대 더 지나갔다. 박스 옆면 문장이 바뀌어 있었다.
‘오늘 당신이 잊으면 곤란한 한 문장: 상대의 속도는 그 사람의 시간대다.’

바람이 지나갔다. 강은 짧게 숨을 쉬고, 다리는 그 숨 길이에 맞춰 아주 미세하게 길이를 조정했다—마치 서울이, 오늘만큼은 모두의 발목 위치를 이해한 듯.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연두색 우비가 물었다.
도윤은 강 건너편의 지붕들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늘이 움직이며 글자를 만들었다. 경복궁 쪽이었다.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림자 프린터. 오늘의 규칙, 누가 써내려가는지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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