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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광고 사라짐 — 장편 7장 본문

A Seoul of Singularities

강남의 광고 사라짐 — 장편 7장

DATAUNION 2025. 8. 20.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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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21분.
강남대로의 네온은 아직 켜지지 않았지만, 이미 읽고 있었다.
빌딩 외벽의 초대형 스크린들이 일제히 물건을 내렸다. 할인은 사라졌고, 대신 한 줄씩의 문장이 번갈아 떠올랐다.

— 오늘 당신이 잊으면 곤란한 한 문장: 숨을 길게. —
— 물. —
— “다음.” —

도윤과 연두색 우비가 교보타워 사거리에서 멈춰 섰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눈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스크린이 주의력 환불 모드로 전환되면서, 시선이 일정 시간 이상 붙으면 안내가 떴다. “환불 가능: 7초. 수령 장소 → 편의점, 면세 품목 포함.”
주의력은 탈세가 많았고, 오늘부터 환급이 시작된 것이었다—주의력 약탈에서 주의력 돌려주기로.

횡단보도 앞 주의력 세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표지판은 간단했다.

주의력 반출입 신고
면세: 물 한 모금, 짧은 고개, 타인의 5분 존중
관세: 끝없는 스크롤, 자기 과잉, ‘너 때문에’ 선제 사용
납부: 보폭 크레딧, 빈 쉼표 사용, 고양이 동행

창구엔 세관원과 고양이 한 마리. 고양이의 양자 꼬리 하나는 대로를, 다른 하나는 골목길 카페를 가리켰다—가장 조용한 길은 늘 옆에 있었다.

빌딩 스크린이 첫 장을 넘겼다. 광고 대신, **주의력 기사(記史)**가 출력되었다. 오늘 하루 강남대로가 수집한 천만 개의 짧은 맥박—엘리베이터에서 버튼을 기다리는 3초, 회의실 앞에서 문손잡이를 잡았다 놓는 1.2초, 카톡 알림을 누르지 않는 0.8초—이 모두 합쳐져 한 편의 통계를 만들었다.
연두색 우비가 중얼거렸다. “사람들의 안 보는 시간이 기록되는 도시라니.”
도윤이 웃었다. “드디어 대로가 우리를 덜 잡아끄네.”

신호가 바뀌며, 횡단보도 바닥에 문자 지문이 떠올랐다. 사람마다 한 줄씩—오늘 스스로에게 건네기로 했던 말.
“원인.”
“다음.”
“물.”
“조용히.”
보폭에 맞춰 글씨가 흐릿해졌다가 선명해졌다.

건너편 스크린에 주의력 배당 공지가 떴다.

오늘의 대로 배당

  • 환급 총량: 2,113,904초
  • 1인 평균: 6.3초 + 물 쿠폰 1
  • 프리미엄 환급(빈 쉼표 보유자): 말끝 지연 0.3초 × 1회

우비가 도윤의 팔을 툭 건드렸다. “당신, 빈 쉼표 크라운 있죠. 프리미엄.”
“고작 0.3초.”
“오늘 같은 날엔 0.3초가 기적.”

길 옆 주의력 회수소에 줄이 생겼다. 회수소는 은행 창구처럼 생겼지만, 직원 대신 문장 편집기가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스크린에서 환급받은 7초를 들고 왔다. 편집기는 물음표 모양의 포트를 열고 말없이 물을 따른 뒤, 종잇조각 크기의 금속 쉼표를 한 개씩 건넸다. 영수증 하단엔 이렇게 찍혔다.
“면세 처리 — 물 한 모금, 짧은 고개. / 환급 — 주의력 7초. / 선택 — 말끝 지연 0.3초 예약.”

그때, 대로 중간에 오짜(誤字) 광고상이 트럭을 세웠다.
“오늘의 문장—‘당신이 잊으면 괜찮은 한 문장’으로 교체해 드림! 마음 편한 메시지 전문!”
트럭의 팔이 뻗어 스크린 모서리에 스티커를 붙였다. ‘곤란한’을 ‘괜찮은’으로 바꾸는, 단어 하나의 사기.
순간, 사람들 표정이 느슨해졌다. 해야 할 작은 일들이 미끄러졌다. 누군가는 엄마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고, 누군가는 약을 놓쳤다. 도시의 면역계가 미세하게 기침을 했다.

고양이가 트럭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양자 꼬리 하나가 스티커, 다른 하나가 바람 API 호출구를 가리켰다. 연두색 우비가 손목을 들어 올려 짧게 주문을 걸었다. 남산에서 다듬어 내려오는 보랏빛 바람이 트럭을 스쳤다. 스티커가 툭, 툭 떨어지고, 스크린의 문장이 제 자리로 돌아왔다.
— 오늘 당신이 잊으면 곤란한 한 문장 —
트럭 기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바람은 과하지 않게, 그러나 정확하게 일을 끝냈다.

오늘의 대로 규칙이 선포됐다. 스크린 여섯 대가 동시에 같은 활자를 벼렸다.

1) 광고는 물건을 팔지 않고, 인간의 하루를 안전하게 만든다.
2) 주의력 환급은 물 한 모금과 동급이다(면세).
3) 타인의 문장을 3초 이상 붙잡지 않는다. (시선 관세 부과)

규칙이 적용되자,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길이 서로에게 붙잡혀 있던 순간들이 부드럽게 풀렸다.
길거리 리포터가 누군가의 울음을 카메라로 붙잡으려다, 스크린에서 경고가 떴다. “시선 관세: 3초 초과. 공명세로 전환합니다.” 리포터는 카메라를 내렸다. 대신 종이컵의 물을 건넸다. 무너지는 장면이 사라지고, 짧은 고개가 대신 들어갔다.

횡단보도에 서 있던 노부부가 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도 받을까, 환급?”
회수소에서 나온 종이컵을 마신 순간, 노부부의 개인 시계가 0.3초 늦춰졌다. 그 0.3초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숨, 기억, 미소.

대로 한쪽, 주의력 공시가 띄워졌다.
— 과거 24시간 내 ‘끝없는 스크롤’ 평균: 41분 → 33분
— “엄마에게 전화하기” 실행률: 28% → 46%
— “물 마시기” 실행률: 37% → 62%
수치가 초콜릿처럼 빠르게 녹았다가, 다시 굳었다. 사람들은 수치를 보며 서로를 평가하지 않았다. 오늘의 규칙 3번이 이를 막았다. 비난 없는 차이의 거리.

연두색 우비가 길가 수거차를 가리켰다. 트럭 옆면엔 *“백색소음 수거”*라고 적혀 있었다. 드라이버가 마이크로 말했다. “불필요한 자기 과잉 소리, 오늘만 무료 수거합니다.” 사람들은 가끔 들고 다니던 자기 홍보 문장을 잠깐 트럭에 넣었다. 돌아오는 건 작은 스티커였다. 의미 없음(Null). 오랜만에 마음이 조용해졌다.

해가 기울자, 스크린이 마지막 주의력 배당을 실시했다. 보도블록에 작은 문장들이 촉촉하게 내려앉았다.
“오늘 당신이 잊으면 곤란한 한 문장: 자기 자신을 과장하지 않기.”
문장이 발에 밟혔다가, 신발 밑창에 얇게 붙었다가, 다시 바닥으로 옮겨졌다. 유통되는 다짐—광고가 아니라 합의.

우비가 회수소에서 받은 금속 쉼표를 도윤의 손바닥에 올려 놓았다. “말끝에 달지 말고, 눈끝에 달아 보세요.”
“눈끝?”
“보는 걸 한 박자 늦추면, 잡아채려던 것들이 도망가요. 그 자리에 남는 게 진짜 볼 일이더라고.”

도윤은 쉼표를 엄지와 검지로 잡고, 시야의 가장자리로 가져갔다. 강남대로의 빛이 반 박자 늦게 들어왔다. 스크린의 문장들이 덜 요란해졌고, 대신 사람들 얼굴의 작은 신호가 또렷해졌다—물 마시고 안도의 숨을 쉬는 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늘을 보는 이, 고양이에게 길을 물어보는 이.

하늘이 어두워졌다. 스크린 여럿이 동시에 야간 모드로 전환되었다. 파도가 잦아들 듯, 빛이 낮아졌다. 마지막 공지가 떠올랐다.

강남 야간 규칙

  • 1시간당 ‘별 보기’ 권장 20초 (시선 관세 면세)
  • 편의점 면역계와 연동: 오늘의 환급 자동 기부 옵션
  • 오짜 광고 적발 시, 팔로워 몰수 대신 조용한 길 봉사 70보

고양이가 신호등 아래로 걸어왔다. 양자 꼬리 하나가 별을, 다른 하나가 골목의 낮은 간판—“물 / 여백”—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방향으로 흘렀다. 별 보기 20초가 도시의 새 통화였다.

연두색 우비가 말했다. “오늘 대로, 꽤 잘했네요.”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고가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에게 돌아왔네.”
그는 영수증을 접어 지갑에 넣었다. 아래엔 작은 로그가 찍혀 있었다.
“주의력 환급 수령: 7초 / 사용: 물 1, 말끝 지연 0.3초 / 기부: 별 보기 20초”

바람이 불었다. 네온은 켜졌지만 조용했고, 스크린은 말했지만 짧았다.
강남대로는 그날 밤, 아무것도 팔지 않으면서 많은 것을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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