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이 야간 근무를 마칠 때쯤, 영수증 프린터가 마지막으로 딸깍거렸다.
면세: 물 1, 짧은 고개 1 / 말끝 지연 예약 0.3초.
그 문구가 종이 끝에 걸려 흔들리는 동안, 자동문이 열렸다 닫혔다. 바깥 공기엔 젖은 신문 냄새랑, 누군가의 말끝에 타던 열이 조금 섞여 있었다.
가게 앞 의자엔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앉아 있었다. 노란 우비와 빨간 장화. 장화 끝에 검은 고양이가 턱을 얹고 있었다. 아이는 계산대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짜로 0.3초면 덜 싸우게 돼요?”
서윤은 영수증을 반으로 접어 아이에게 내밀었다. “대부분은. 붙이기 힘든 말들이 멈칫하거든.”
아이의 손바닥 위에서 영수증이 가볍게 떨렸다. 고양이가 꼬리를 두 번 흔들었다. 아이가 현관문 쪽을 가리켰다. “엄마가 곧 와요. 어제 카드 취소가 안 됐대요. 숫자 삼, 삼, 공, 공. 그게 엉켜서….”
그 숫자는 요즘 동네에 자주 떠다녔다. 종이 영수증에도, 사람 등줄기에도.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면 물부터 드리라고 해. 그 다음에, 네가 먼저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여.”
“물… 고개… 0.3초.” 아이가 외우듯 중얼거렸다. 고양이가 의자에서 내려와 자동문 앞에서 한 번 더 꼬리를 흔들었다. 가장 조용한 길이 그쪽이라는 뜻이었다.
아이가 떠난 뒤, 서윤은 주머니에서 얇은 금속 쉼표를 꺼냈다. 가운데가 텅 빈, 손톱만 한 토큰. 밤새 동네의 루머를 덜어내고, 사소한 모멸을 냉장고에 식혀 보냈더니 손끝이 서늘했다. 그 서늘함이 마음 안쪽까지 번지기 전에, 그녀는 쉼표를 다시 포켓에 넣었다.
오늘은 쉬는 날이었다.
정오가 가까워질수록 햇빛은 활자처럼 날카로워졌다. 서윤은 경복궁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당 돌바닥 위엔 이미 얇은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오늘의 문장이 놓일 자리. 사람들은 경계선 바깥에 모여 햇빛을 기다렸다. 처마 끝 그림자가 천천히 미끄러지자, 은행잎들이 떨림으로 점을 찍었다. 첫 줄이 나타났다.
질문은 명사로 시작한다.
서윤은 휴대폰에 찍어 둔 문장들을 지웠다. “왜”로 시작하는 말이 너무 많았다. 두 번째 줄이 조금 늦게 찍혔다.
용서의 단위는 ‘다음’이다.
숨이 하나 가벼워졌다. 마지막 줄이 흔들릴 때, 담장 위의 고양이가 그림자 한 자리에 앉으며 획을 고정했다.
오늘은 문장의 길이를 탓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흩어졌다. 서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바닥에 남은 활자 찌꺼기가 햇빛 밑에서 서서히 말랐다. 오늘 하루 동안 저 세 줄이 도시 구석구석으로 번져 갈 것이다. 편의점 영수증, 횡단보도 바닥, 카페 화분의 잎맥, 그리고 사람들 입술 끝.
휴대폰이 진동했다. ‘오늘 저녁, 보자.’ 보내는 사람은 언니였다.
서윤은 한참을 화면을 보다가 쉼표를 하나 떠올렸다. 그 쉼표가 마음속 문장의 끝을 0.3초 늦추는 동안, “그래”가 “원인.”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한 단어를 보냈다. “장소.”
‘마포대교 앞. 해 지기 전에.’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를 건너는 건 대체로 옳은 일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든.
마포대교의 금속은 낮보다 저녁에 더 진짜 같았다. 푸른 안내광이 길 가장자리를 흐르고, 보행자 쪽엔 신고대가 펼쳐져 있었다.
감정 반출입 신고
면세: 서운함 2단어, 실망 1장면
관세: 분노, 모욕, 자기 경멸
납부: 걸음, 숨, 쉼표
언니가 먼저 와 있었다. 손에 쥔 종이가 구겨져 있었다. 서윤은 종이에 찍힌 붉은 글자를 알아봤다. 취소 실패: 3,300.
오랜만에 만난 얼굴 앞에서, 말은 보통 길어진다. 서윤이 먼저 금속 쉼표를 꺼내 들었다. “말을 줄이려는 게 아니고, 먼저 숨을 붙잡으려는 거야.”
언니가 잠깐 웃었다. “넌 아직도 이런 걸 들고 다니네.”
“밤마다 필요한 동네가 있어.”
“네가 지키는 동네.”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고양이가 난간 위를 걸어가며 양자 꼬리를 교차시켰다. 말 없는 70보 구간이라는 뜻이었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원인.” 서윤이 입을 열었다. 명사로 시작하면 감정의 앞머리가 잠깐 눌린다.
언니가 숨을 골랐다. “엄마.”
그 단어에는 오래된 굴곡이 붙어 있었다. 서윤은 개인 시계 옆면의 크라운을 살짝 돌렸다. 말끝이 0.3초 늦춰졌다. “다음.”
“집 팔아서, 요양원 근처로.”
“물.”
언니가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난간에 기대서 한 모금 마셨다.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다리 중간쯤에서, 바닥 패널 아래로 열이 내려갔다. 냉각층이 열을 받아 먹는 소리가 아주 약하게 났다. 전광판이 한 줄을 띄웠다.
대답보다 호흡을 먼저 낸다.
오른쪽 차선 너머로, 누군가 푸른빛 길 위를 걷고 있었다. 검은 셔츠, 구겨진 영수증 두 장. 서윤은 그 등짝에서 밤마다 보던 숫자를 떠올렸다. 3,300.
언니가 먼저 말했다. “저 사람, 봐.”
“보여.”
“동행… 해 줄까?”
서윤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의 발목에, 야간 근무의 피로가 무겁게 달려 있었다. 하지만 동행은 때때로, 길을 스스로 짧게 하기도 한다. 그녀는 신고대 직원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동행 밴드가 채워졌다. 공명세: 오늘 밤 발목 붓기 가능.
세 사람의 보폭이 아주 조금 맞춰졌다. 고양이가 앞질러 가서 난간 근처에 앉았다. 말 없는 70보가 끝나자, 언니가 종이를 내밀었다. “이건 의미만 환불할 수 있대.”
서윤이 종이를 두 손으로 받았다. “의미만.”
“실물은 지갑에 남고.”
둘은 웃었다. 같은 말을 다른 날, 다른 목소리로 여러 번 했을 것이다. 오늘은 한 번만 했다. 의미를 훨씬 잘 운반했다.
출구 쪽에서 세관원이 빈 쉼표 하나를 건넸다. 가운데가 비어 있는 쉼표. 말을 미룰 것이 아니라 정리하려고 쓰는 지연. 언니가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네가 쓰던 거랑 똑같네.”
“같은 회사에서 나온 걸 거야.” 서윤이 농담처럼 말했다. “동네 전용.”
다리를 벗어나자 해가 거의 젖었다. 강 위의 바람이 얇아졌다. 언니가 물었다. “밥 먹을래?”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잠깐 들를 데가 있어. 내일은 동대문이라.”
“또 새벽 근무?”
“응. 취향 엔진이 새 장르를 배우는 날이래.”
언니는 손을 흔들었다. 돌아서는 어깨에서 오래된 서운함이 하나 떨어져 나가 바닥에 닿았다. 소리 없이, 그렇지만 분명히.
연남동으로 가는 길에 작은 카페에 들어섰다. 문 옆의 화분들이 잎맥으로 대화의 틈을 조정하고 있었다. 바질이 속삭이고, 스투키가 호흡의 길이를 얇게 바꾸고, 몬스테라가 침묵을 해석했다. 식물 통역사가 카운터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어떤 말이에요?”
“짧은 말.” 서윤이 말했다. “오래 미뤘던.”
“명사로 시작해 주세요.”
“사과.”
통역사는 금속 쉼표를 스투키 줄기 사이에 꽂아 주었다. “여기서 읽어 보세요. 발목에서 한 번 더 걸릴 거예요.”
서윤은 숨을 들이쉬고, 그녀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이해하고 싶다, 나부터.”
바질은 첫 음절의 모서리를 둥글게 갈았다. 몬스테라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백을 보기에 알맞게 잘랐다. 페퍼민트는 ‘다음’의 체온을 약간 올렸고, 로즈마리는 기억의 모서리에 달팽이관 같은 향을 덧댔다. 문장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눅눅한 날씨에서 덜 무너지는 방식으로 서 있었다.
계산대에 작은 병이 놓였다.
번역 영수증(향): 원인/사과/다음 · 말끝 지연 0.3초 × 1 · 면세: 물/짧은 고개.
서윤은 병을 주머니에 넣었다. 포켓 안쪽에서 금속 쉼표와 병이 부딪혀 가느다란 소리가 났다.
문을 나서서,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동쪽에서 곡선을 그리며 어둠이 왔다. 그 어둠은 생각보다 친절했다. 해야 할 말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어울리는 길이를 찾게 해줬다.
새벽 두 시 반, 동대문은 절반쯤 깨어 있었다. 레일 위로 옷걸이가 오르내렸고, 마네킹들은 서로의 어깨선을 스캔했다. 오늘은 라펠의 각도가 조금 더 낮았다. 사과가 문장 앞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배치사가 서윤을 보더니 투명한 카드를 건넸다.
개인 치수 외-파라미터
휴대 쉼표: 1
오늘의 질문 시작어: 명사
속도 존중 지수: 중
“오늘은 여백이 많이 팔릴 거예요.” 배치사가 말했다. “문장 길이를 탓하지 말자는 규칙 때문인지.”
“길이를 탓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용서하죠.” 서윤이 답했다.
배치사가 웃었다. “당신은 늘 그런 결론을 좋아했어요.”
인퍼런스 룸 안에서 각성천이 그녀를 비췄다. 천 표면에 ‘다음’이라는 단어가 얇게 떴다가 사라졌다. 왼쪽 안감에 얇은 포켓이 생겼다. ‘결심 보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급하게 꺼내면 찢어지는, 깊은 주머니. 서윤은 손을 넣어 보았다. 쑥 들어갔다가, 천천히 빠져나왔다. 포켓 가장자리가 아주 작게 열을 남겼다.
계산대의 편집기가 말했다. “명사로 시작할까요?”
“원인.” 그녀가 대답했다.
영수증 상단에 굵은 글씨가 찍혔다.
원인 — 보폭 조정 +1칸 / 빈 쉼표 단추 설치 / ‘너 때문에’ 후순위.
내일 이 옷을 사러 올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옷은 때로 사람보다 먼저 아는 일이 있다. 오늘 남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그러했듯이.
가게 문을 닫고 나오는데, 휴대폰이 또 진동했다. 언니였다.
‘내일 아침, 엄마 병원. 같이 갈래?’
서윤은 한참 동안 화면을 보았다. 문장이 길어질 조짐이 입술에서 움직였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금속 쉼표를 꺼내 엄지로 문질렀다. 0.3초. 그 시간만큼, 말이 다른 모양을 찾았다.
“다음.”
보낸 문자는 아주 짧았지만, 서윤은 그 말이 어떤 긴 것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일 아침 물을 챙길 것,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로의 5분을 평가하지 않을 것, 대답보다 호흡을 먼저 낼 것. 짧은 말 뒤에 길게 접힌 규칙들이 그녀의 손등 위에서 조용히 펼쳐졌다.
길 끝에서 고양이가 한 번 멈춰 서서, 꼬리를 반 바퀴 돌렸다. 가장 조용한 길을 가리키는 신호. 서윤은 그 방향으로 걸었다. 발목이 살짝 무거웠다. 공명세의 잔여였다. 하지만 무거움이 다 나쁜 건 아니었다. 무게는 종종, 사람이 들고 가기로 한 책임의 단위이기도 했다.
새벽 공기가 옅어지자, 그녀의 주머니에서 금속 쉼표가 한 번 울렸다. 소리는 나지 않았는데도 울렸다고 느껴졌다.
오늘도 도시가 잘 자고, 덜 뻗기를.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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